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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록

오직 한 사람의 차지

by 이북북 2020.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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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

선배는 국화를 참아냈고 그렇게 선배가 참는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마음이 서늘했다. 그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란

안그러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절박함에서야 가능한데 그렇다면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p.25

국화는 난데없이 자기는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이기는 사람,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람이

되겠다고. 강심장이 되겠다는 뜻이냐고 물었더니 아니 그게 아니고 이기는 사람,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상태로

그걸 넘어서는 사람, 그렇게 이기는 사람. 정확이 뭘 이기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국화는 냉정하고 무심하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리라...

 

p.46

은수가 어떻긴 뭐가 어떤가. 그냥 잘생기고 가난하고 우울하고 뭔가 일이 안 풀리고 불안정하고 종종 죽고 싶고

그런데도 일은 나와야 하고 꿈은 멀고 다 귀찮고 때론 내 몸이라는 것 자체가 귀찮아서 버리고 싶고 길바닥에

버리고 줄줄 새어나오게 심장이랑 머리랑 손톱이랑 발목이랑 벗어두고 홀가분해지고 싶지. 그렇게 젊은 게 좋으면

니들이나 가져라, 하면서 젊다고 할 수 잇는 것들은 다 버리고 눕고 싶지. 아무데나 누워서 구름이나 세고 싶지.

 

p.66

그때는 여름이라서 개구리와 풀벌레들이 입을 모아 합창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나는 것이 아니라 구르는 것처럼 들렸다.

소리가 나는 것이 몸체와 바깥 사이의 단순하나 진동 과정이라면 구르는 건 동력도 필요하고 공감각적이고 사건적이어서

전자가 자연의 문제라면 후자는 천체의 문제 같았다. 당시에는 기와의 결혼이 그렇게 느껴졌다.

 

p.78

인생이란 열기구와 같아서 감상을 얼마나 재빨리 버리느냐에 따라 안정된 기류를 탈 수 있다고. 아무것도 잃으려 하지

않으면 뭘 얻겠어,

 

p.92

올라탄 자전거에서 내리지 못했던 것 뿐이라고

 

p.98

유나가 그렇게 노래를 절단 낼 때마다 애들은 웃긴다며 와르르 엎어졌지만 나는 불쾌했는데 그 사랑 노래들을 사랑 노래인

채로 더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사랑이 그렇게 시시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왜나면 그게 아니라도 세상에는

시시한 것들 투성이니까.

 

p.113

그 고립감은 소중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고 마치 햇볕에 달궈진 모래밭을 밟았던 아까의 낮처럼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따뜻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이 별이 된다는 것은 아닐까. 측정할 수 없는 정도의 열기를 갖게 되어 눈부시게

밝아진다는 것은 아닐까.

 

p.120

우리가 몸을 만질 때나 함께 걸을 때나 사랑해, 라고 표현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마음에 비해 그걸 드러낼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원래 없다기보다는 우리의 무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없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것

같았다.

 

p.148

송은 희극배우의 나이가 몇이더라, 생각했다. 자기보다 많게는 열 살쯤 많을 것이다. 자기도 십 년이 지나면 저렇게 되어 있을까,

다시 생각했다. 저렇게 불안하고 우울하게 안정감 없게 외롭게 가진 것 없게 내쳐진 채 나쁘게, 살게 될까. 송은 희극배우가

확실히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 나쁘나면 지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뭔가 옛일을 완전히 매듭짓고 끝내고 다음의 날들로 옮겨온

흔적이 없었다. 그의 날들은 그냥 과거와 과거가 이어져서 과거의 나쁨이 오늘의 나쁨으로 이어지고 그 나쁨이 계속되고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차피 나빠질 운명인 것이다. 선택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선택되는 것이다.

 

p.258

K가 매장으로 들어가서 "엄마!"하고 부르면 엄마는 잠깐 반가워하다가 매대 아래 커다란 흰색 나무상자 안에서 빈틈없이

많이도 밀어넣은 비닐봉지를 들려주며 눈치껏-그것이 그를 가장 난감하고 모욕적으로 느껴지게 했는데- 계산대를 피해

나가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비닐봉지를 들고 나가는 그 순간, 그는 스스로 꿈꾸는 어떤 세계, 취향에 따라 샴푸를 고를 수

있는 백인 소녀의 세계, 혹은 혁명을 꿈꾸는 일개미의 세계,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아니면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면 일순 몸을

드러내는 어떤 다른 세계의 가능성이 아주 닫혀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런 건 없고, 그러니까 K에게 그런 세계는 허용되지

않고, 허용된 것은 집으로 실어날라야 하는 채소나 과일 같은 것, 지불 없이 무상으로 얻은 그 몇 푼 하지도 않으면서

그를 수백 배의 무게로 짓누르는 수치심과 죄책감 같았다.

 

.

.

.

 

엄마가 숨기듯 건넨 b품의 과일봉지를 들고 위축되어 계산대를 슬적 지나가는 K의 모습에서...

부모가 손에 쥐어 준 것에 따라 아이가 어떤 꿈을 꾸게 되는지, 어떤 마음을 갖게 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부모가 손에 쥐어 준 것은 꼭 물질적인 것에 한정된 것은 아닐테다. 부모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스며들 것이다.

미래의 나의 아이가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을 닮는 다고 생각하니... 인생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 이 단편은 마지막에 실린 <쇼퍼, 미스테리, 픽션>

외에도 마음에 든 단편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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